[ 2024 코스개편 ] 인천둘레길 1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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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Jan 14, 2024

거리 : 7.5km
소요시간 : 3시간
경로:
계양산성 박물관 - 임학정 - 청수수목원 - 솔밭쉼터 - 피고개 - 중심성 터 - 징매이고개 - 계양산 장미원(이규보 시비) - 계양산 산림욕장 - 계양근린공원 - 계양산성 박물관

사진 / 경로 / GP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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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인천의 둘레길과 종주길, 이야기를 담다"

옛 계양도호부의 진산인 계양산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코스이다.
인천 북부지역의 중요한 녹지 구간으로서 부평을 중심으로 한 인천북부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서 상징성을 갖는 공간이며 생태 환경에서도 중요하다.
둘레길이 시작되는 계양산성박물관은 9차례에 걸쳐 진행된 계양산성 조사에서 발굴된 유물뿐만 아니라 한국의 산성과 관련된 자료들과 계양구 지역의 변천사 과거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진 영상 지도 등을 전시한다.
계양산 자락에는 산에 깃든 기운을 받들어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도당굿이 올려졌다.
도당굿은 주로 중부지방에서 보통 매년 정월 초나 봄 가을에 행해졌다.
제를 올리는 비용을 집집마다 추렴하며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를 더하고 마을 주민 중에서 깨끗하고 덕 있는 사람을 대표로 뽑아 굿을 주관하게 하였다.
마을 제사의 하나였던 동제가 마을 대표 몇 명이 제관이 되어 엄숙하게 치러지던 남성 중심의 유교식 동제였다면 도당굿은 여성의 참여와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하고 즐기는축제의 성격이 강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마을 제사는 거의 자취를 감추기나 간소화되었다.
본질을 벗어나 허례허식에 치중 하거나 나를 잃어버릴 정도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바탕이 흐르는 귀한 정신만큼은 보존해 나가고 싶다.
지금 넘어가는 계양산의 무당골 고개는 제를 주도하던 무당 할머니가 살던 곳이라고 한다.
산길을 걸어 청수 수목원과 고랑재 고개를 지나면 개발의 논리에 사라질 뻔했던 숲을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솔밭쉼터가 기다린다.
이곳은 모 기업이 2006년부터 골프장 조성을 추진하면서 훼손되었던 곳이었지만 시민들의 지치지 않는 노력으로 2018년 인천 계양산 골프장 조성사업이 최종 무산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원래 개발제한구역이었던 이곳의 숲과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나무 위로 올라가 뜻을 전하고 누군가는 나무를 껴안아 벌목을 막고 또 누군가는 단식으로 산보일배로 계양산에 땅을 한 평 사는 것으로 숲을 지키고자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원과 실천이 물방울처럼 모이면서 고단했던 그 시간들을 함께 견뎠고 결국 숲을 지켜냈다.
솔밭쉼터를 떠나 계곡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이제부터 1코스 둘레길에서 가장 팍팍한 피고개를 넘어가는 길이 이어진다.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어째서 피고개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얻게 되었던 것일까?
피고개는 시천동과 검암동을 넘어드는 고개다.
조선시대 검암 마을에 살던 정 진사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삭탈관직을 당하고 이 고기를 넘어오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설화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어떤이는 피를 토할 정도로 힘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 말이 맞는지 피고개로 오르는 길은 높지는 않아도 돌이 많고 가파르다.
피고개에서 징매이 고개를 지나 중심성 터로 가는 길은 앞서 가파른 길이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편안하다.
산길을 따라 걸으면 꽤 많은 돌무더기들이 나타나는데 바로 중심성이 있었던 터다.
이곳에 귀룽나무 쉼터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계양산 전역에 퍼져 있는 귀룽나무 중에서도 특히 커다란 귀룽나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징매이고개를 중심으로 동서쪽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던 산성은 현재 그 잔해만 남았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민중들의 마음을 모아 성을 축조했다는 뜻에서 무리중 마음심을 써서 중심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성문은 경명문이라고 짓고 문 위의 고해루라는 누각을 세웠다.
구한말 부평부사였던 박희방은 서양 열강의 침입이 잦아지자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부평을 수호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1883년 새로운 성을 쌓으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아전과 백성들을 설득하여 함께 성을 쌓았다.
백성들은 돈을 거두어 부족한 재정을 매우고 직접 돌을 나르며 성을 완성시켰다.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충의를 담은 성터를 지나고 징매이고개를 지나면 계양산 장미원으로 가는 길이다.
징매이고개는 계산동과 공촌동 사이에 있는 고개이며 둘레길 2코스로 연결되는 생태통로가 있다.
이 고개는 옛날 삼남지방에서 중국으로 통하던 유명한 고개로 원래는 수주고개로 불렸었다.
현재 사용되는 징매이고개라는 이름은 매를 징발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고려 말 매 사냥을 즐겨했던 충렬왕이 다섯 차례에 걸쳐 매를 징발해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고려 말은 원나라의 간섭이 심했던 때여서 매를 잡아 훈련을 시켜 원나라에 바치기 위해 넘어 다니던 고개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숲이 우거진 이곳을 조선시대 임꺽정이 은거지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매를 경쟁시켜 짐승을 잡았다는 뜻에서 경맹이고개 도적을 피해 이 고개를 무사히 건너려면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여야 한다고 해서 천명이 고개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하나의 지명에 이렇게도 많은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아마도 깊은 역사와 함께 했기 때문이다.
열렬한 사랑! 장미꽃의 꽃말이다.
물론 꽃의 빛깔에 따라 꽃말이 다르기는 하지만 맹세, 행복한 사랑,존경, 순결, 질투 등의 꽃말을 갖고 있다.
꽃말이 가진 능동성과 아름다움 때문에 장미는 인천광역시의 시화로 지정되었고 여러 학교의 교화로도 사랑받고 있다.
계양산 장미원은 봄, 여름, 가을 내내 장미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장미는 5월의 여왕이라고 하지만 요즘은 장미의 품종이 다양해지면서 흐드러진 장미를 가을까지 볼 수 있다.
장미원 안내도를 살펴보면 위치에 따라 어떤 장미들이 피어 있는지 표시가 되어 있다.
모양도 제각각, 빛깔도 제각각, 장미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 싶어 찬찬히 들여다본다.
장미원에는 장미외에도 여러 가지 꽃들이 핀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여름에는 상사화가, 가을에는 구절초가 반긴다.
장미원에는 이규보 시비가있다.
고려 무신정권기 의 문신, 문인, 문장가로 뛰어난 문재를 지녔다고 한다.
이규보는 뛰어난 실력에도 서른이 되도록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 무신 정권을 이끌었던 최충헌이 마련한 시회에서 그를 국가적인 공로자로 칭송하는 시를 써서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규보는 후에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부임하는 곳에서 보고 들을 것을 기록한 글에는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이규보의 시비가 여기 남아 있는 것은 그가 계양도호부 부사로 재임 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남긴 시문들이 훗날 동국여지승람과 부평읍지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고 하니 인천과는 깊은 인연이다.
술을 의인화한 국선생전을 비롯해서 문학 이론과 공적인 글 시 를 모아 펴낸 동국이상국집이 대표적이며 이 책에 실린 동명왕편은 주몽의 탄생에 얽힌 신비한 이야기와 시련을 이기고 고구려를 건설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민족서사시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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