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우상호 의원이 생생하게 전하는 33년 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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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Jun 10, 2020

#故이한열열사 #영화1987 #오늘있게한_33년전오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2020. 6. 9. KBS1 '더 라이브' 방송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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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내용을 인용, 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KBS '더 라이브'을 정확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오언종 : 6월 민주항쟁 33주년인데요.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위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최욱 : 매년 6월이면 사실 마음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상호 : 6월 9일이 제일 힘든 날입니다, 저로서는. 제가 주도한 집회에서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피격돼서 병원으로 옮겨지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날이기 때문에 사실은 6월 9일 하루 동안은 추모하고 좀 전까지도 사실 그때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졸업생들이 지금은 동문들이 한 200여 명, 100명 정도 모여서 추모하고 기념비 앞에 모여서 대화를 나누다 왔는데 그때 이야기하다가 조금 울적한 마음 갖고 왔습니다.
■최욱 : 사실 저희는 얼마 전에 1987, 굉장히 화제가 됐던 영화. 영화로 접한 것과 실제 현장에 계셨던 분. 이 감수성은 결코 같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우상호 : 그렇죠. 그래도 그 영화는 비교적 그 당시 상황을 아주 세세하게 잘 재현해낸 거 같고요. 다만 현장 분위기는 죽느냐, 사느냐. 잡히느냐, 안 잡히느냐. 이런 굉장히 아주 뭐랄까요. 계속 긴장의 최고조. 그거로 계속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으니까요. 훨씬 더 긴장감이 있고 훨씬 더 비장했죠.
#영상
■최욱 : 87년 당시 영상을 저희가 살펴봤는데 현장에 계셨던 분으로서 이거 얼마나 두려움이 컸을까.
■우상호 : 그렇죠. 그때 대체로 이한열 군이 나이가 스물두 해. 22살이니까 사실 얼마나 앳된 청년이었겠어요. 그런데 박종철 군이 물 고문으로 숨지고 나서 저게 우리의 일이 될 수도 있겠다, 하는 두려움이 많이 있었죠. 그런데 더 이상 우리가 물러날 곳이 있을까.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계속해서 독재가 연장되고 우리 후배들에게도 이게 계속될 텐데. 우리가 끝내자, 이런 마음으로 뛰었는데 그래도 그 나이에 두려웠죠. 붙잡히면. 모든 게 끝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 정도는 그래도 좀 비교적 가볍게 하는 것 같은데요. 현장에서 맞아서 눈 터지고 이, 뼈 부러지고 이런 분들도 수없이 많았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냥 전쟁터였어요, 그 자체로. 그러니까 그때의 대학생들이 그런 공포심을 극복하면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는다는 게 사실은 어떻게 보면 이한열 열사 일기에도 나와 있거든요. 5월 광주의 묘지에 가서 묵념하면서. 자기 고민들 털어놓는 일기도 있고 그런데. 어쨌든 그러나 너무 눈앞에서 폭압적인 정권의 참상이 드러나고 거기다 4월 13일에 직선제 개헌을 할 것처럼 쭉 몇 년을 끌어오다가 87년 13일에 개헌하지 않겠다. 이렇게 선언한 이후에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저렇게 집권을 연장하겠다는데, 자기 친구인 노태우 씨에게 넘겨주겠다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을 거냐. 그때부터는 거의 모든 학생이 설사 나에게 죽음에 이르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더 물러설 수가 없다. 그런 결단들을 많이 했죠.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고 해서 6월 9일에 이한열 군이 사망에 이를 만한 그런 피격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오언종 : 그러니까 33년 전 바로 오늘이 그날 아니겠습니까? 이한열 열사가 피격당한 날.
■우상호 : 33년 전인데요. 제가 그날 집회에서 원래 그날 집회는 본격적인 집회가 아니고 그다음 날 6월 10일에 시청에 나가게 하기 위한 일종의 연세인들의 홍보 집회였어요. 그래서 그날은 아무런 무장도 안 돼 있었고 아까 영상을 보셨지만 다 맨손으로 나가서. 플래카드 하나 들고 거기 앉아서 구호 몇 번 외치고 돌아오려고 한. 평화적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교문에 돌아오자마자 저렇게 직격탄을 쏘고 가자마자 거의 뿌옇게 최루탄으로 교문이 아예 그냥 자욱해서 옆에 누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심각하게 최루탄을 쐈죠. 그래서 사실은 당시에 이한열 군이 그렇게 피격된 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집회 현장에서 보통 대여섯 명씩은 저렇게 부상을 입어서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서 대개는 붕대 감고 나오거든요, 그날. 그래서 집회를 마치고 저는 총학생회실에 있었는데 급하게 누가 뛰어와서는 학생회장님, 지금 병원 가보셔야겠습니다. 그래서 왜, 했더니 한 학우가 중퇴에 빠졌답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소리야? 오늘은 돌 던진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네. 그래서 내려가 봤는데 응급실에 있는 의사 선생님께서 가족에게 전화를 하셔야겠습니다. 그 순간 그냥 쇠망치로 머리를 탁 맞은, 가족한테는 이런 데모한다고 알리지 않았을 텐데. 이거 어떻게 하나. 생명이 위독하다는데. 그래서 어떻게 할 수가 없죠. 의사 선생님이 시킨 대로.
■오언종 : 직접 알리셨어요?
■우상호 : 아니요. 제가 연락처를 모르니까 그쪽 과 동기들한테 광주에 있는 집 전화번호를 알 수 없으니 과 사무실 가서 주소, 인적사항 중에서 집주소를 알아서 전화를 해라. 그래놓고 지금 이 시간쯤 되겠네요. 11시 반쯤에 광주에서 급히 어머니가 누님하고 올라오셔서 중환자실로 급히 뛰어 들어가셨죠, 뭐. 그러니까 저는 너무 초조해서 밖에 서 있는데.
■오언종 : 밤새 계셨겠네요.
■우상호 : 어떻게 합니까? 제가 학생회장인데, 학생들의 안전도 책임질 의무가 있는데. 그래서 어머니랑 가족이 뛰어 들어가는데 말 한마디 못 붙이고 암담하게 서 있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6월 9일은 오후 4시 반부터 밤새우는 기간까지 정말 너무 초조하고 제발, 제발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길. 그런데 그때 의사 선생님께서 중태다, 의식이 없다. 다음 날 언론에는 뇌사 상태라고 보도가 됐죠. 그래서 참 그때 암담했죠.
■최욱 : 그때 아까 영상 잠깐 보니까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우상호 : 처음에는 6월 10일 오후 6시에는 주로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때 학생회장 중에서는 저만 거리에 나갔는데. 왜냐하면 제가 다 잡혀가면 또 안 되니까, 지휘부가. 그래서 나갔는데 처음에 6시부터 한 7시까지는 주로 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들어갔다가 해산됐다가, 뛰어들어갔다가, 이런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한 7시쯤 돼서는 워낙 많은 학생이 거리에 내려 서니까 경찰들이 좀 밀려놨어요. 그랬더니, 직장인들이 퇴근을 안 하고 인도에 서서 계속 지켜보고 계신 거예요. 처음에는, 처음에는. 지켜보고 계시면서 우리가 구호 외치면 박수 쳐주고. 막 쓰러지면 휴지 주고 물 건네 주시고 그러시다가 7시 반 넘어서 공간이 확보되니까 그 직장인들이 같이 거리에 내려와서 같이 행진을 시작하시는 거예요.
■오언종 : 그럼 지금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운 거예요?
■우상호 : 시청 앞은 못 들어가고. 명동 롯데백화점에서 그 신세계 분수대 쪽으로. 그 큰 도로를 가득 메웠죠. 그런데 저희가 학생 운동하면서 거리 시위를 여러 번 했지만 일반인이 합류해준 적이 없어요. 심지어는 경찰한테 인계한 경우도 있고. 직장인 넥타이 맨, 직장인들이 쭉 거리로 내려오기 시작하는데 그때 제가 눈물이 막 나고, 이런 일이 있구나. 저분들이 우리의 투쟁을 지지해 주고 계시구나. 저분들도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었구나.
■오언종 : 그런 열망들이 모여서 결국 6.29 선언까지 이어졌고. 그런데 6.29 선언 일주일 후에 이한열 열사가 끝내 사망하고 맙니다. 묘지에서 직접 영정 들으셨잖아요.
■우상호 : 그렇습니다.
■오언종 : 그때 기분 어떠셨어요?
■우상호 : 진짜 속으로 그랬죠. 이것은 우상호가 죽어야 할 위치에 왜 이한열이 서 있다 이한열이 대신 죽냐. 영정 들고 가면서 이건 내가 죽어야 할 일인데, 이런 고민들을 계속하고 있었죠. 아마 그때는 저뿐만 아니라 살아 있던 많은 학생이 이한열의 죽음이 남의 죽음이 아니고 자기 죽음처럼 느꼈던 애통함이 있었죠.
■최욱 : 그러니까 이한열, 박종철, 그 열사의 자리에 누구라도 갈 수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우상호 : 그럼요. 그러니까 사실은 박종철 군도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이한열 군도 그 사람이 학생회장도 아니고 무슨 학생 대표도 아니었어요. 평범한데 오늘은 물러설 수가 없어요. 그러고 서 있다가 물러서지 않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희생당한 거죠. 그러니까 그건 오히려 최루탄 터졌을 적에 막 평소처럼 뛰어서 도망갔던 친구들이 그때 너무 괴로웠던 거예요. 이한열 군은 물러서지 않아서 숨지고 우리는 물러섰기 때문에 살았네. 그러니까 그다음 날부터 난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어. 한열 열사가 가면.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시위에 참여하고. 그래서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 그런 도화선이 됐죠.
■최욱 : 결국은 노태우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었는데 6월 항쟁. 저희가 어떻게 기억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우상호 : 그 엄혹하던 시절에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누군가는 직장을 잘릴 각오를 하고 거리에 내려섰던 그 작은 결단들이 마치 큰 바다를 이루면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던 큰 변화의 한 큰 계기로 그렇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언종 :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보면 그날이 씨앗이 돼서 피어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우상호 : 그럼요. 그리고 그분들이 지금은 또, 민주주의가 많이 진전된 지금은 또 평범하게 직장 생활하시고 행복한 가정을 이끌고 계시지 않습니까? 꼭 기억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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