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서 김득구와 맨시니의 감동적인 스토리. 전세계인이 기억하는 복싱 역사 최고의 비극, 난타전이였던 명승부 하이라이트 영상.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 복서 김득구 with Cl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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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 On Jan 16, 2021

미국인과 맨시니 시점에서 바라본 김득구 복싱과 한국인의 저력.
1982년 11월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호텔 특설링.
비운의 복서, 그리고 헝그리 복서 김득구는 또 다른 비운의 복서 맨시니를 만나, 사생결단의 명승부를 펼칩니다
세계챔피언 타이틀 2차 방어전에 나선 맨시니도, 그 경기를 반드시 이겨야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맨시니의 아버지는 1940년대 유명한 이탈리아계 미국인 복서였습니다.
줄곧 상위 랭커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타이틀을 쟁취하지 못하고 세계2차 대전에 나가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그 후유증으로 복싱을 그만두게 된 그의 아버지는 이후, 노동자로서 공장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갑니다.
가난하게 자랐던 맨시니에게는 형이 있었습니다. 형제는 세계챔피언이 되지 못한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고 싶어 복싱을 시작합니다.
맨시니보다는 그의 형이 복싱에서 더욱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맨시니도 20살이 될때까지 16승 무패의 전도유망한 복서로 성장합니다.

성격도 밝고 유머 감각도 풍부해서 늘 여자들이 따라다니던 그의 형은 맨시니가 20살이 되던 1981년 발렌타인데이에 그의 17세 여자친구에게서 총격을 받아 살해됩니다.
맨시니는 그 사건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아버지의 꿈을 이룰 아들이 형이 아닌 자신이 된 그는 그 사건 이후로 더욱 미친듯이 복싱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CBS 스포츠 프로그램에서 그의 가족 스토리를 방송에 내보냅니다.
1980년대 흑인들이 유명 복서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 젊고 잘생긴 이탈리아계의 백인 복서의 스토리는 영화 록키 발모아의 인생과 비교되며,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는데요.
당시 돈킹과 함께 거물 프로모터로 활약하던 밥 애럼은 그의 인기를 포착하고 재빨리 그와 계약을 하게 됩니다.
거물 프로모터의 날개를 단 맨시니는 곧바로 세계타이틀전을 치르게 됩니다.
WBC 라이트급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그는 잘 싸운다가 14회 KO 패를 당합니다. 정확하게 1년 후, 김득구 선수가 유리했던 경기에서 14라운드 KO패를 당하게 된 것처럼 말이죠.
미국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과 6개월만에 WBC 세계타이틀전을 갖게 되고 그 경기에서 승리하며 복싱 세계챔피언에 등극합니다.
프로모터 밥애럼은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맨시니의 타이틀을 유지시키고 싶었습니다.
당시 라이트급에 세계적인 선수들이 즐비했지만, 그는 그들을 피하고 미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한 선수를 주목합니다.
그 선수가 싸워 17승을 거둔 상대들은 모두 처음 들어보는 아시아 선수들이었습니다.
맨시니가 그를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판단했죠. 그래서 밥 애럼은 김득구를 맨시니의 2차 방어전 재물로 추진합니다.
동양챔피언이 된 김득구였지만, 세계타이틀전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꿈에 그리던 세계타이틀전이 성사됩니다.
가난하고 차별받았던 배우지도 못했던 김득구, 그의 인생에서 세계챔피언은 유일한 인생의 목표였고, 반드시 재취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1982년 11월 미국 라스베거스에서 열린 이틀전을 준비하러 간 김득구는 필승을 다집하듯, 관을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이 소식은 취재한 기자에 의해 경기 전부터 미국에 알려지죠.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맨시니는 뒤늦게 김득구의 경기 영상을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그의 근성, 터프한 싸움들. 맨시는 그와의 경기가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경기 전날 김득구가 묵엇던 라스베거스 호텔방에는 '죽거나 살거나" 라는 글을 붙혀 놓았다는 것을 알게된 맨시니는 마치 전쟁터에 끌러가는 병사처럼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전미국에 생중계될 맨시니의 경기는 미리부터 큰 관심을 끌게 됩니다. 맨시니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백인스타 선수였죠.
그는 이 경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약체라고 알려진 아시아의 선수에게 진다면, 자신이 아버지 대신 쌓아올린 복싱 패밀리로서의 명예와, 꿈만 같던 그의 인기는 순식간에 식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는 자신이 스타덤에 오를 자격이 있는 선수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느때보다도 강렬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던지는 의지와 불꽃같은 강렬한 투지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충돌을 일으킵니다.
김득구는 전사같았습니다. 모든 언론이 맨시니가 쉽게 승리할거라고 예측했지만, 싸움은 뜻밖에 강대강으로 호각세였습니다.
그건 대단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둘은 생존을 위해 싸우는 것 같았습니다. 맨시니의 펀치들이 김득구에게 날려졌지만, 그는 영향 받지 않는 듯 했습니다. 맨시니의 몸은 아팠고 머리는 어지러웠습니다.
그는 김득구의 힘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만한 싸움이었습니다.
3라운드에서 그의 귀가 찢어졌고 그는 왼손을 다쳤습니다. 4라운드에 그의 눈은 부어올랐고, 싸우는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건 오랫동안, 서로 주고 받으며 지지치 않는 싸움이었습니다.
나는 오늘밤 여기에서 우리 둘중, 하나는 죽거나 산다고 생각했다. 나도 절대로 질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맨시니 복싱 매니저 : 맨시니는 라운드 내내 경기를 잘 풀어가고 있었지만, 김득구는 매 라운드 후반부가 되면 정신을 차리고 그와 랠리를 벌였습니다. 이 싸움은 매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죠.
8라운드가 끝났을때, 세명의 심판중 한명은 동점이었고, 두명은 맨시니가 아주 조금 앞설 뿐이었습니다.
적지인 미국 현지에서의 판정은 불리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김득구가 더 잘싸운 경기였습니다.
하지만 김득구가 맨시니를 이기려면, 10라운드 안에 그를 KO 시켜야 했습니다.
매니시는 놀랍게도 15라운 경기를 뛸 수 있도록 잘 훈련된 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그의 경기에서 늘 11라운드부터 더 강했고, 후반전에는 거의 그의 페이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맨시니는 바디히트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김득구의 바디를 계속 쳐대는 것으로 그의 몸은 서서히 침식을 당했습니다.
김득구의 펀치는 파워를 잃어가고 있었죠. 13라운드가 시작되자 맨시니는 39개의 펀치를 날렸지만, 반대로 단 한대의 카운터 펀치도 맞지 않았습니다.
이미 김득구의 몸은 더 이상 경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있었다.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 듯 보였습니다.
내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라운드 종료 직전 그가 뒷걸음을 치더니, 나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모든 에너지를 소비한 것처럼 보였는데, 어디서 그의 에너지가 갑자기 나오는지 놀라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강렬한 의지로 뻗을 수 있었던 마지막 힘이었습니다. (KO)
트레이너 : 아주 힘든 경기였기 때문에 김득구가 다운 되었을때 무척 기뻤습니다. 나는 김득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고 그저 행복했습니다.
링닥터 : 그의 동공이 확장되어고 맥박이 느려지고 있었다. 그가 흐릿한 정신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을때,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슈거레이 레너드 : 그가 그냥 탈수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네바다주 선수위원회 : 그가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가 지쳤는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마 50년 동안 네바다주 라스베거스에서 심각하게 다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형이 죽은 후 17개월만에 맨시니는 자신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죽음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몇개월 후, 김득구의 어머니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고, 또 몇개월 후, 그 경기에서 심판의 심판이 경기 중단을 적절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려 우울증에 빠진 후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그 비극적인 뉴스들은 맨시니에게 매우 극심한 정서적 트라우마에 던져주게 됩니다.
맨시니는 이 경기 이후로 심리적인 불안정 상태를 안고 내리막을 걷게 되며 세게타이틀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됩니다.

위대한 명승부를 남기고 떠난 김득구의 아들. 태어난서 단 한번도 아버지를 느껴보지 못했던 불행한 그의 아들은 이제 치과의사가 되엇습니다.
맨시니는 그 소식을 듣고 정말 행복했고, 그로 인해 조금이나마 자신의 죄책감이 치유되어서 고맙다고 밝혔습니다.

김득구는 한국 복싱의 헝그리 정신의 표본이었습니다.
알리와 타이슨 등등 1980년대 까지만해도 전세게의 복싱은 가난하고 불우했던 청년들에게 희망이 되는 스포츠였습니다.
비록 승리는 하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준 정신력과 저력은 전세계 복싱역사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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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g : 이철희 - Like a movie
자료출처 : https://gongu.copyrigh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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